연화대학교 총장
연화원의학교 총장
초대

폴 언더우드
2대

마이클 언더우드
3대

폴 언더우드 주니어
4대

이안섭
연화의학전문학교 총장
초대

강원호
2대

안창엽
3대

송재원
온주의과전문학교 총장
초대

스즈키 이치로
2대

이토 다카아키
연화의과대학 총장
초대

김준식
2대

이원호
3대

로버트 킴
4대

송명휘
5대

한동윤
6대

원상훈
7대

이민성
권한대행

최철호
8대

안명섭
9대

구현무
연화대학교 총장
초대

구현무
2대

차재원
3대

안영환
4대

이한
5대

유덕화
제6대 연화의과대학 총장
제12대 학교법인 명월학원 이사장
원상훈
元尙勳 | Won Sang-hoon
출생 1921년 5월 9일
해강도 함학시
사망 1998년 10월 11일
해강도 함학시
직책 제12대 학교법인 명월학원 이사장
1962년 ~ 1972년
연화의과대학병원 원장
1980년 ~ 1983년
제6대 연화의과대학 총장
1985년 ~ 1988년
정보 더 보기
자녀 원치홍(장남)
원치우(차남)
종교 개신교(감리회)
백암(白巖)
학력 함학고등보통학교 (졸업)
온주의과전문학교 의과대학 (의학/학사)
연화의과대학 대학원 (의학/박사)
경력 연화의과대학병원 내과장
연화의과대학병원 원장
연화의과대학 의과대학 의학과 교수
제12대 학교법인 명월학원 이사장
연화의과대학 의과대학 학장
제6대 연화의과대학 총장

학교법인 명월학원 이사장 출신의 인물로, 어린 나이부터 의과대학 의학과 교수직을 수행한 인물이다. 또한 화명명월초등학교명월예술고등학교 설립 당시 명월학원 이사장직을 겸임하였다. 1972년에 명월학원 이사장직을 사임하고 의과대학 학장 직을 수행하다 은퇴를 앞둔 시점이었던 1985년, 연화대학교 총장에 당선되었다.

일생

학사 이전

의과대학 졸업 이후

광복 직후 연화의과대학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하였다. 그러다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원상훈은 군의관으로 근무하였다.

휴전 협정 이후에는 연화의과대학병원으로 돌아와 내분비내과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다 학교법인 명월학원이 설립하였고, 연화의과대학학교법인 명월학원의 산하 대학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학교법인 명월학원과 인연을 시작하게 된다.

1960년부터 연화의과대학의 교수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교수로 근무하면서 학교법인 명월학원의 이사직을 추천받았고, 이에 승낙하면서 학교법인 명월학원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1962년 학교법인 명월학원의 이사장으로 당선되었다.

학교법인 명월학원 이사장

학교법인 명월학원 이사장으로 당선되면서 이사회의 권한을 조정하였다. 소수의 이사회가 재단 산하 학교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재단 산하 학교의 권한을 상향시켰다. 또한 내부감사기관을 확대시켜 내부 비리를 예방하고자 하였다.

1960년대 초 원상훈은 남해도를 제외한 지역에도 재단의 철학에 맞는 교육을 하고자 하였다. 남해도를 중심으로 시작된 학교였기에, 남해도와 가장 가까운 청산도에 설립을 추진하였다.

처음에는 중등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협상에 진전이 없자 초등교육기관까지 고려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화명시와 협상이 타결되어, 1963년 화명명월국민학교가 개교하였다.

이사장 임기가 종료되자, 차기 연화의과대학 의과대학 학장로 부임하였다.

연화의과대학 의과대학 학장

1973년,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직후 연화의과대학 의과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사장 시절 재단의 간섭을 줄이고 학교의 자율성을 높였던 그는, 학장 취임 후 본격적인 의학교육의 내실화에 집중하였다.

그는 '훌륭한 의사는 훌륭한 인격에서 나온다'는 지론을 바탕으로 예과 과정에 인문학 강의를 필수 교양으로 지정하는 등, 훗날 연화의대의 학풍이 되는 인술(仁術)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1973년 학장 취임 당시, 대한민국은 새마을 운동이 정점에 달하고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의료 인프라는 여전히 도시에 집중되어 있어 도서 산간 지역은 심각한 무의촌(無醫村) 상태였다.

원상훈은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고자 했다. 그는 1974년, 의과대학 커리큘럼에 '농어촌 무의촌 진료 봉사'를 정식 학점 과정으로 편입시키는 파격을 단행했다. 온주시를 거점으로, 방학마다 학생들과 함께 직접 의료 봉사를 떠났다. 이는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훗날 1977년 도입된 의료보험 제도와 공중보건의 제도가 정착하기 전, 지역 사회 의료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당시 국가 고시 제도가 강화되던 추세에 맞춰 '유급 불사'의 엄격한 학사 관리를 도입해 학생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연화의대의 의사 국가고시 합격률을 전국 최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토대를 마련했다.

연화의과대학병원장

1980년 봄, 정치적 격변기 속에 병원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대학가와 병원은 부상자로 인해 긴장감이 감돌던 때였다.

원상훈은 '병원은 성역이며, 환자 앞에서는 이념이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피신한 학생들을 경찰이 연행하려 하자, 병원장 직을 걸고 원내 경찰 진입을 막아선 일화는 당시 의국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된다.

연화의과대학 총장

우선 낡은 중앙도서관을 허물고 현대식 '명월학술정보관'을 신축하여 학생들의 학습 환경을 대폭 개선하였다.

1987년,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학내 시위가 발생했을 때는 총장으로서 학생들을 보호하면서도 원칙을 지키는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여 큰 충돌 없이 학사 일정을 마무리 지은 일화가 유명하다. 1988년 총장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은퇴

1988년 총장직에서 물러난 원상훈은 백암(白巖)이라는 호처럼 흔들림 없는 원로로 남았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아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의학교육에 바쳤지만, '진정한 치유는 의학뿐만 아니라 공학, 인문학, 사회과학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학문적 토양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석에서 제자들에게 종종 '우리 연화가 언젠가는 의학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종합대학이라는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당시 재단의 역량으로는 병원 확장이 최우선이었기에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고, 1998년 그는 이 뜻을 유언으로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이후 2012년 연화대학교가 해연대학교를 인수함에 따라 종합대학교로 변화하자, 기존 해연대학교의 캠퍼스 이름에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암캠퍼스'로 명명하였다.

경력